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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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2/23(목)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성 토마스 합창단
비회원
2012.02.13
조회 549

1.일시 및 장소 : 2012년 2월 23일 (목) 오후 7시 30분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프로그램 : 바흐 마태 수난곡 전곡

3 출연 :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빌러(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성 토마스 합창단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걸작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룬 ‘마태 수난곡’

바흐 음악 원류에 대한 강한 가각과 자신감, 자연스러운 정취.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서울의 봄’을 소생시킨다. 바흐가 생전 26년간 직접 지휘한 800년 전통(1212년 창단) 성 토마스 합창단과 멘델스존이 조련한 세계 최고 관현악단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기 2004, 2008년에 이어 세 번째 내한공연을 다시 바흐 ‘마태 수난곡’으로 갖는다.

‘작은 파리’라 불리는 독일의 고도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바흐 ‘마태수난곡’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1723∼1750년 바흐가 칸토르(음악감독)로 재직한 성 토마스 합창단. 바흐 나이 44세 때인 1729년 ‘마태수난곡’은 성 토마스 합창단의 활동 거점인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초연됐다. 뿐만 아니라 바흐 합창음악의 불후의 명작인 수난곡, 오라토리오, 칸타타, 모테트의 대부분이 이 합창단을 통해 초연됐다.

8∼18세 청소년 합창단원 80여명은 성 토마스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 이들이 매주 3회 펼치는 성 토마스 교회 공연에는 2천여 음악신도가 모여든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멘델스존이 종신 지휘자를 맡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초연 백년 후 바흐 ‘마태수난곡’을 세상에 부활시킨 것도 멘델스존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서였다.

단순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드라마 보듯 전개하기 보다 슬픔을 응축하고 내면화하는 성 토마스 합창단의 해석은 바흐 마태수난곡의 전범으로 충분하다. 공연이 모두 끝난후, 자연스레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할 겨울 끝자락의 특별한 예술 체험이 될 것이다.

- 자막 제공(합창석 스크린), 합창석에서는 자막 시청 불가
- 공연시간 : 약 3시간 10분 (휴식 1회) - 마태수난곡의 멘델스존 개정판으로 연주

Program
바흐 : 마태 수난곡 전곡

Soloists
솔리스트 : 우테 젤비히(Ute Selbig, Soprano) 슈테판 칼레(Stefan Kahle, Alto) 마르틴 페촐트 (Martin Petzold_Evangelist), 크리스토프 겐츠(Christoph Genz, Tenor, Arien), 마티아스 바이헤르트(Matthias Weichert, Bass, Jesus), 고톨트 슈바르츠(Gotthold Schwarz, Bass, Arien)



지휘자 Conductor

바흐의 전통을 잇는 16대 토마스칸토르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빌러 |Georg Christoph Biller

1955년 위스토루터 호반의 도시 네브라에서 태어난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빌러는 10세 때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 부속 토마스 학교에 입학, 강도높은 음악교육을 받았다. 1976년 라이프치히 음대 지휘과에 입학, 롤프 로이터와 크루토 마즈아를 사사했으며 학창시절 청소년 합창그룹인 라이프치히 보컬 크라이스를 결성하기도 했다. 1980년 1월부터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계약을 했으며 같은 해 8월 1일부터 이 악단의 수석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

구 동독의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객원지휘자로도 빈번히 공연하는 한편 리트 가수 및 오라토리오 가수로도 활약하고 있다. 1992년 5월 바흐의 전통을 계승한 제16대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 칸토르로 취임한 빌러는 역대 토마스 칸토르의 업적을 계승하여, 성 토마스 교회에서 행해지는 콘서트나 매주 일요일 예배의 모테트나 칸타타 프로그램도,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바흐, 현대 작품에 이르는 교회 전례와 관련이 깊은 프로그램으로 구성하는 등 종교 음악에 높은 관심을 보이며 합창지휘를 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Orchestra

1743년 결성된 세계 최고의 명문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Gewandhausorchestra zu Leipzig

'작은 파리'라고 불리는 유럽의 고도, 동독의 정신적 지주였던 라이프치히의 문화적 상징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J.S 바흐가 서거하기 7년 전으로 바흐와 텔레만이 활동하던 1743년에 창단된 260여년 전통의 오케스트라다. 1743년 라이프치히의 상인 12명이 12명의 음악가를 초청해서 연주회를 연 것이 이 악단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에는 주로 카페에서 연주를 하다가 1781년부터 게반트 하우스(의류센터)에서 연주회를 가졌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오케스트라의 이름이 되었다.

이 오케스트라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멘델스존은 종신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직을 수행했는데 당시 명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를 악장으로 맞아들여서 이 악단을 발전시켰다. 멘델스존은 이 오케스트라를 빼어나게 조련시킨 것 외에도 사장되었던 바흐의 '마태수난곡' 등 당시에 잊혀졌던 바흐의 음악을 부활시켰고 슈만에 의해 발견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하는 등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1895년에는 근대 지휘법의 완성자이자 최초의 전문지휘자인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를 맡음으로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제2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고, 니키슈에 의해 악단의 기능은 최고로 발휘되었다. 니키슈 사후에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등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이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게반트하우스 건물은 파괴되었으나 곧 뜻있는 사람들의 원조로 재건되어 1949년에는 프란츠 콘비츠니가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부터 옛 명성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1960년 여름에는 라이프치히에 오페라극장이 건립되었는데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빈 필하모닉과 마찬가지로 콘서트 외에도 오페라 극장의 반주를 맡고 있으며 바흐가 종신 재직했던 성 토마스 교회에서 갖는 예배의 칸타타 연주도 콘비츠니 시대부터 담당해 오고 있다. 콘비츠니 사후에는 바츨라프 노이만, 오트마르 주이트너 등 당대의 명지휘자들이 이 악단을 지휘했고 1970년부터는 거장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를 했다. 특히 마주어는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 그치지 않고 동독 붕괴 시 대통령으로 추대될 만큼 문화적, 정치적으로 높은 위상을 갖고 있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지닌 동독에서의 상징적 의미를 세계인들에게 과시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거장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를 카펠마이스터(예술감독)로 맞아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단원 2백 50명이 복잡한 순환근무 체계로 라이프치히 오페라,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 반주, 정기 연주회 48회, 특별 공연 25회, 해외공연 35회를 맡아서 하고 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42명 단원으로 구성된 이번 내한 투어에서 자신들의 대표적 장기곡인 바흐 종교음악의 최고봉 '마태수난곡' 전곡 연주를 통해 국내 음악 팬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줄 것이다.




합창단 Choir

바흐가 종신 칸토르로 재직하고 ‘마태 수난곡’을 초연한 800년 역사의 합창단
성 토마스 합창단 | Thomanerchor zu Leipzig

성 토마스 합창단은 독일의 문화적 자존심인 고도 라이프치히시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단체이자 문화 기관이다. 1212년 오토 4세가 성 토마스에 아우구스티노 참사회 수도원의 설립을 인정하면서부터 성 토마스 합창단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 수도원에는 성직 후계자를 양성하는 수도학교가 있었는데 후에 수도원에 살지 않는 소년들의 입학도 허락하게 되었으며 당시부터 소년들의 교육 프로그램중의 일부로서 당시부터 전례가곡이 있었다. 수많은 유명한 지휘자들이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의 칸토르(음악감독)로 임명이 되어왔는데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칸토르는 게오르크 라우이다. 라우의 취임기간은 1518년에서 1520년으로 마르틴 루터와 요한 에크의 논쟁이 일어났던 시기에 해당한다. 라우 이후 바흐가 칸토르를 맡기 전까지 유명한 지휘자로는 제토우스 카루우사우스(1594-1615), 요한 베르만 샤인(1616-1630), 요한 쿠나우(1701-1722)를 들 수 있다. 1723년부터 1750년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이 합창단의 칸토르를 역임했다. 바흐는 성 토마스 합창단이 최고의 음악을 구사하도록 조련, 유럽 굴지의 청소년 합창단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바흐는 성 토마스 합창단의 역대 칸토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손꼽힌다. 바흐 합창음악의 불후의 명작인 수난곡, 오라토리오, 칸타타, 모테트의 대부분은 성 토마스 합창단을 통해서 초연되었으며, 현재도 이 합창단의 레퍼토리로 이용되고 있다. '마태수난곡' 또한 성 토마스 합창단에 의해 본거지인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초연되었다. 지금도 바흐의 합창곡들은 성 토마스 합창단에 의해서 계속 불려지고 있다. 바흐 이후 칸토르로는 요한 프리드리히 드레서, 요한 아담 힐러, 요한 고트프리트 그리고 20세기의 칼 슈트라우베와 귄터 라민 등이 있다. 슈투라우베와 라민은 성 토마스 합창단의 발전과 그 명성을 전세계로 알려나가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라이프치히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교회 음악의 중심지가 되게 만든 지휘자들이다. 특히 금요일과 토요일에 성 토마스 교회에서 진행되는 모테트와 칸타타의 상연은 음악적 사건으로도 칭해지고 있다. 20세기 들어와서 합창단의 국내외 순회공연도 활발해졌는데 1920년 칼 슈트라우베의 인솔 하에 첫 해외투어가 스칸디나비아에서 이뤄진 이래 세계 주요도시를 순회공연하고 있다. 8세에서 18세에 이르는 80명의 합창단 단원들이 성 토마스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성 토마스 합창단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라이프치히 토마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합창단 생활은 대부분 연습이기 때문에 지휘자가 인간적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합창 단원의 성장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성 토마스 합창단의 주된 활동은 무지카 사크라 즉 교회음악으로 매일 매일 연습의 결과, 매 주말 성 토마스 교회에서 진행되는 모테트나 바흐의 칸타타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 주에 3회 진행되는 성 토마스 교회 공연에는 약 2200명의 청중이 모이고 있다.
솔리스트 Soloist

소프라노 우테 젤비히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재능있는 소프라노로 1984년 라이프치히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콩쿨에서 입상한 후 칼 마르크스 시립 극장의 솔리스트 앙상블 멤버로, 1년 뒤에는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레의 정단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오페라 외에도 바흐의 하이든, 모차르트, 텔레만, 멘델스존의 종교 음악과 가곡 분야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테너 마르틴 페촐트(복음사가)
라이프치히 태생,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에서 음악교육을 받고 라이프치히 음대에서 성악 전공 현재 동합창단에서 솔리스트 및 성악 선생으로 활동 중. 라이프치히 오페라극장에서 '젊은 연인들을 위한 엘레지'의 토니, '한 여름밤의 꿈'의 푸르트, '코'의 이완 역등을 불렀으며 유럽의 오페라 극장에서 주역가수로 활동중이다.
유럽, 미국, 일본, 이스라엘에서 공연을 했으며 드레스덴 성 십자가 합창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중부 도이치 방송관현악단, 함부르크 몬테베르디 합창단의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긴밀한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다.

테너 크리스토프 겐츠 (아리아)
작센주 프랑켄베르크 태생,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에 입단, 합창 솔리스트 및 합창지휘자로활약, 드레스덴 음대 졸업, 작센 주립 오페라 솔리스트, 드레스덴 음대 교수, 슈만 상, 후고 볼프상 수상 바이로이트 음악제 장학생, 콘서트 가수 및 오페라 가수로 활발한 활동, 드레스덴 성 십자가 합창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정기적으로 공연. 라이프치히 오페라, 작센 주립 오페라, 잘츠부르크 주립 오페라, 브뤼셀 국립오페라에서 객원 연주자로 출연하고 다양한 CD 레코딩 등 다채로운 활약을 펼치고 있는 가수이다.

베이스 마티아스 바이헤르트(예수)
작센주 프랑켄베르크 태생,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에 입단, 합창 솔리스트 및 합창지휘자로활약, 드레스덴 음대 졸업, 작센 주립 오페라 솔리스트, 드레스덴 음대 교수, 슈만 상, 후고 볼프상 수상 바이로이트 음악제 장학생, 콘서트 가수 및 오페라 가수로 활발한 활동, 드레스덴 성 십자가 합창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정기적으로 공연. 라이프치히 오페라, 작센 주립 오페라, 잘츠부르크 주립 오페라, 브뤼셀 국립오페라에서 객원 연주자로 출연하고 다양한 CD 레코딩 등 다채로운 활약을 펼치고 있는 가수이다.

베이스 고트홀트 슈바르츠
작센주 츠비카우 출생, 드레스덴 교회음악학교와 라이프치히 멘델스존 음대에서 수학, 성악, 오르간 지휘법 전공했다. 슈바르츠는 일찍부터 유럽의 주요한 음악 중심지 및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특히 성 토마스 교회합창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성 십자가 합창단, 프리드만 인마 트렘펫 앙상블과 정기적으로 공연하며,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빈 무지크페라인 출연, 유럽 각지, 미국, 일본 이스라엘에서 공연 하였다. 바로크에서 현대곡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로 콘서트, 오페라, 리트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프로그램 Program

바흐 : 마태 수난곡

바흐는 루터파 가계에서 태어나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로 생활했다. 그는 “모든 음악의 목적은 신의 찬양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신에게 음으로 봉사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바흐는 코랄 전주곡집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게 바친다”라고 썼다. 칸타타와 수난곡들의 악보 서두에 J.J(Jesu,juva·예수여 도와주소서)라고 쓰고, 마지막에 SDG(soli Deo gloria·하나님에게 영광있으라) 등의 글자를 써 넣을 정도였다.그는 종교적인 예술과 세속적인 예술 사이에서의 원칙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6∼27장을 소재로 한 걸작 ‘마태수난곡’. ‘음악의 목적은 신을 찬양하는데 있다’고 믿었던 바흐는 이곡에서 그의 진실한 신앙을 고백한다. 2부 78곡 전편에 흐르는 장대함이 회개의 눈물을,그리고 예수 고난에 동참케한다.

1870년 프리드리히 니체는 한통의 편지를 썼다.

“이번 주에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세 번이나 들었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 나를 감쌌다네. 기독교를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도 아마 이 음악에서 복음을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1723년 5월 독일 쾨텐에서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 합창단 총감독(칸토르)으로 부임했다.그의 나이 38세.그는 이곳에서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을 담당하게 됐다. 당시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는 성 금요일이면 모든 음악활동이 중단된 채 오직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수난곡만 연주됐다. 바흐 역시 라이프치히로 온 후 첫 성 금요일인 1724년 4월7일‘ 요한 수난곡’을 발표했다. 청중의 탄성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 후 5년 동안 그의 수난곡을 다시 들을 수 없었다.

1729년 4월 바흐는 마태복음서 26,27장의 수난을 소재로 한 ‘마태수난곡’을 발표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의 이야기를 묘사한 극음악인 수난곡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수난곡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마태복음 26장 1절부터 27장 66절까지 예수수난 부분을 중심으로 피칸더가 쓴 대사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전체 2부 78곡으로 이루어졌으며 전곡 연주에는 약 3시간이 걸리는 대작이다. 이 '마태수난곡'중 여덟 곡의 아리아와 마지막 합창은 쾨텐의 영주이며 바흐가 주종관계를 넘어 우정을 맺고 있던 레오폴드 공의 추도식을 (1729년 3월 24일) 위해 작곡한 '장송 칸타타' 속에서도 발견된다. 전 68곡(78곡)

1부 프롤로그,책략, 베타니아의 도유, 유다, 최후의 만찬, 올리브 산, 겟세마네, 예수의 체포
2부 프롤로그, 대제사, 베드로의 부인, 유다의 최후, 빌라도 앞의 예수, 골고다, 3시, 매장

78곡 중 알토의 영창 ‘참회와 회한은 죄의 마음을 두 갈래로 찢어’와 베드로가 세 번 거짓말 한 뒤 예수의 말을 기억하며 통회하는‘나의 하나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듣는 이의 마음도 함께 통회의 늪으로 빠뜨린다. 알토의 영창‘아 골고다에’와 소프라노의 아리아‘사랑 때문에 이제 나의 구세주는 죽어가고 계시다’,수난의 코랄 마지막에‘진정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가사에 의한 세 소절의 합창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예수의 고난에 동참케 한다. 마태수난곡은 서사적인 장대함을 지닌 하나의 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